사주명리 2편
사주명리학이란
엄마 뱃속에서 나온 내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페호흡을 막 시작하면 그때 천지의 시간성이 첫 숨과 함께 나의 몸(오장육부)에 새겨진다. 사주명리는 몸이 간직한 이 시간의 기운이 그 사람의 삶 전반에 작용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오장육부에 찍힌 시간적 기운은 그 사람만의 독특한 패턴으로 차별화 된다. 이 몸의 개별패턴은 감정과 행동양식 그리고 삶의 인연조건을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창조해 낸다.
따라서 '사주명리학'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은 참으로 정교한 이론이다. 보통 명리학을 영적 직관으로 간주하곤 하는데 그거야말로 편견과 오해의 소산이다. 음양오행론은 아주 정교한 물리학에 가깝다. 태극에서 음양으로, 음양이 다시 오행으로 이 오행이 육십갑자로 분화되면서 거시 세계와 미시세계를 하나로 꿰뚫는 앎의 체계가 탄생하는 게 그것이 곧 음양오행론이다.
사주명리학은 특히 그러한 이치를 사람의 일생과 결합한 일종의 해석학이다. 사주명리학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지식과 담론의 차원에서 배척하고 무시하는 한편, 실용적 차원에선 맹목적으로 의존하기도 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나의 운명은 얼굴과 오장육부 칠정과 십신까지 두루 관통한다. 여덟 개의 카드에 담긴 몸과 인생의 리듬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사주명리학이다.
사주명리학을 보는 방법
사주명리는 생년월일시를 가지고 평생의 운을 읽어 내는 것(만세력을 통해 자신의 태어난 년월일시만 있으면 바로 알수 있다) 이고 관상은 얼굴에 드러나 있는 운명의 지도를 읽어 내는 것이다.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는 반드시 얼굴에 드러나고 그 얼굴에 드러난 기운에 따라 일생의 리듬을 밟아 간다는 것이 기본원리다. 그런 점에서 얼굴, 곧 안면성은 존재에 대한 최고의 표현형식이자 우주의 비의가 숨겨진 최상의 텍스트다. 사주는 시간적 관찰이고 관상은 공간적 관찰이라 할 수 있다.
사주가 관상이고 관상이 사주이다.
주어진 사주를 가지고 상극이 많은지 상생이 많은지 뒤섞여 있는지 파악하는것이 중요하다.
일간이란 본질 이라기보다 하나의 척도에 가깝다(아래 그림에서 천간에 나타난 기토 지지에 나타난 유금이 바로 일간이다. 우측에서 세번째 노란색 열을 의미한다) 즉,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기준점에 해당하는 셈이다. 병으로 따지면 맥점이고,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의 축이라 할 수있다.오행에 따른 신체기관이 정해지면 그건 바로 생리의 축이다. 그것은 당연히 성정으로 이어진다. 그럼 나의 사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개별 사주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앞페이지의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링크)
팔자는 먼저 오행이 펼치는 오장육부의 생리적 기전을 알려준다.
간/담(목)이 발달한 사람과 간(혈액의 저장소, 혈의 양과 혈당 조절) ,담낭(담즙은 간에서 생성되고 간의 기능이 좋아야 이담 작용이 가능)과
담즙은 소장과 대장 등의 연동운동을 항진시키며, 장내의 세균의 번식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고, 방부작용을 하기도 한다.
특히 이 담즙의 분비를 조절, 담낭의 기능이야말로 간과 더불어 인간의 생체 기능을 원활하게 유지하게 하는 가장 으뜸이 되는 역할을 한다.
페/대장(금)이 발달한 사람은 동일한 리듬으로 살아가기 어렵다.일단 얼굴 모형이나 동작의 선분이 다르다. 전자는 둥글넓적한 편이고, 후자는 각이 지고 예리해 보인다. 또한 심장/소장(화) 중 특히 심장의 열이 과도하게 뜨거운 사람과 신장의 찬 기운이 왕성한 사람은 보도 듣고 해석하는 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관계를 맺는 방식도, 돈을 버는 형태도 각기 다르다.
고로 명리학은 몸의 철학이다. 그러므로 이 매트릭스 안에서는 의학이 곧 역학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몸’ 이 스승이고 ‘마음’이 제자다.
몸을 보고 마음이 배운다.
따라서 튼실한 허벅지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
하체의 힘이 상체를 받혀주고
상체에 포진되어 있는 머리와 가슴,
그리고 눈과 입과 귀가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다.
의역학(醫易學)
몸의 생리는 곧 칠정과 칠신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칠정(七情-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서 기쁨(희, 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두려움(구,懼), 사랑(애,愛), 싫어함(오,惡), 바람(욕, 欲)의 일곱으로 묶어 나타내었다.) 과 칠신(七神) 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칠신(七神) 은 혼(魂),백(魄),의(意),지(智),신(神) - 오장이 칠신을 간직 하고 의식활동과 의식적 작용을 아우르는 말. 포괄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행로인 샘이다.
예컨대 신장이 발달된 사람은 아이디어가 풍부하다. 간/담이 발달된 사람은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있고 페/대장이 발달된 사람은 감수성이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낭만주의 시인들이 폐결핵을 앏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위가 발달된 사람은 넉살이 좋고 심/소장이 발달된 사람은 항상 낙천적이고 유쾌하다. 썰렁한 개그에도 잘 웃는다. 이런 리듬에 따라 사회적 장이 펼쳐진다. 가족관계, 직업, 취미, 친구관계 결국 팔자란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지도다. 목을 북돋우려면 간담의 기운과 통한다. 간담은 모려와 결단이다. 칠정으로 분노다. 분노는 대체로 해롭지만 청정한 분노는 기운을 활발하게 소통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운명의 지도가 있다면 대개 두 개의 반응이 나온다.
운명에 정해진 것이 어디 있는가?
운명은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데!라는 시니컬한 반응이 하나이고 , “모든 것이 정해졌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탄식이 다른 하나다. 겉보기엔 반대지만 둘 다 편견의 소산이라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운명(運命)은 말 그래도 “명을 운전하는 것이다.” 명을 쫒아가는 것과 명을 운전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내 명을 운전하려면 태과(넘치는 것)과 불급(모자라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팔자의 원칙은 이것뿐이다. 태과와 불급을 벗어나야 오행의 순환이 가능하다. 습관이란 이 순환을 가로막는 태과/불급의 상태를 뜻한다. 내 팔자가 아무리 험난할지언정 내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소위 개운 법(開運法) 바로 그것이다. 이 담론이 사주명리학의 하이라이트이다.
용신(用神) 으로서의 글쓰기
개운법이 ‘운을 여는’ 포괄적 개념이라면 용신은 구체적인 방편을 지칭한다. 용신을 찾는 것 자체가 명리분석의 절정이자 난코스가 된다. 용신을 찾으려면 팔자와 대운까지를 포함해서 운 전체의 리듬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통찰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만약 금과 수로 가득 차서 목이 결핍된 사주가 있다면 목이 곧 용신이다. 그러면 전 과정에서 목의 오행적 속성을 적극 활용하면 된다. 푸른색 동쪽, 숫자 3과 8 등 내 존재의 익숙한 리듬에 아주 낯선 타자를 끌어들여 팔자 전체를 튜닝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그래야 습관의 중력이 무장해재 되면서 새로운 리듬이 조성될 테니 말이다. 용신의 핵심은 나의 관찰이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 바로 글쓰기다. 내면의 치열한 관찰.. 그래야만 나의 용신이 보인다.
개운법(開運法)
음양오행의 흐름 속에서 해독하고 나면 어떤 운명이건 ‘태과불급’이 드러난다. 용신을 찾는 데에도 다양한 길이 있다. 용신을 찾는 것 자체가 명리분석의 절정이자 난코스이다. 용신을 찾으려면 온 전체의 리듬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통찰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용신이란 내 몸과 운명이 지닌 모순의 ‘결합점’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한계상황 혹은 문턱. 이걸 넘지 못하면 늘 챗바퀴를 돌 수 있는 그 지점 말이다. 그만큼 자신을 살피는 일이 어렵고 중요하다. 지식이나 정보로는 도저히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지혜는 전공이나 학벌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직 삶 하고만 관계한다.
자신의 감정과 호흡, 판단과 행동,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장면들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용신이 되는가? 그 원리는 다름 아닌 몸에 있다. 지혜가 생기면 호흡을 조절할 수 있다. 호흡이 평온해지면 면역계가 활발해질뿐더러 용기와 부지런함, 관용 등의 덕목을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고대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에선 질병의 원인을 ‘지혜 없음’ 곧 무지에서 찾았다.
다시 말하면 지혜란 가장 심오한 정신활동이자 가장 구체적인 생리적 기전이다. 지혜는 몸을 평화롭게 한다. 고요한 능동성 그것이 평화다. 그런 점에서 평화는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신체적 능력의 표현이다. 그래서 지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척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앎과 몸 사이에 간극이 없어야 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원효대사- 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일도, 화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지는 법이다. 간극이 없으면 깨달음이 되고 간극이 줄어든다. 우주가 그러하듯이, 마음은 크기와 사이즈, 스케일 등이 아니라, 오직 수렴과 발산을 통해서만 작용한다. 결국 길흉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팎의 조응인 셈이다. 자업자득, 자작자수!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러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결론
마흔이 넘었다. 나는 무엇을 겪었으며 어떻게 고난을 이겨냈으며 그러한 과정속에서 내 몸의 습속과 욕망 그리고 팔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하나씩 집어 본다.그리고 나의 존재는 단 하나의 명령을 받는다.
살아 있으라! 그리고 행복하라!
행복하기 살기가 존재의 유일한 명령이다. 그런데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한다. 무엇이 행복인지,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를. 상품으로 주입된 행복의 이미지를 버리고 돈이 행복의 전부라는 고루한 노예의 행복을 버리고 자기구원으로서의 앎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돼라!”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이 도(道)다!”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난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해야하고 내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라면 난 그런 지혜를 가질 준비를 해야할 때이다.
Appendix - 서양사상과 비교하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라는 말에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숙명론” 과 “결정론” 이다. 숙명론은 인간은 자유로울수 없다. 정해진 길로 살아간다. 반면 결정론에는 자유가 보장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때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고 선택은 내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선택권이 제한되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의지를 발휘해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다시 결정론은 결정론과 자유론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앞서 말한대로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인과관계의 법칙 이다. 반대로 자유론은 인간의 행위는 상당 부분 물리적 심리적 법칙 등 자연 법칙에 지배를 받지만 인간의 의지가 어떤 행위의 선택과 결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자유의 문제와 책임의 문제는 궤를 같이 한다.
되돌아와서 서양의 의식이나 동양의 의식이나 분명한 차이가 있는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흐르는 맥은 비슷하다.
동양사상의 묘미는 내면의 성찰을 통한 자기혁신을 먼저 강조할 뿐이다.
참고자료 :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고미숙 -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이재욱 - 사주도 공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