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 / 2001년. 오강남 / 현암사
30대 초반 결혼을 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임신을 했다. 비록 팍팍한 살림살이였지만 남들만큼 열심히 살려고 발악과 노력을 겸하고 있었다.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한 후 5개월 정도 지났을까? "푸른색 계통의 옷을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에 사내아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양산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난 아내 몰래 모종의 계획을 준비했다. 첫 아이에 대한 예비 아빠로서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조용히 흘러가고. 출산일 즈음이였다. 아내의 갑작스런 하혈로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게 되었고 난 그때 회사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저녁에 가겠다고만 전했다. 가까이에 장모님이 계시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그런데 아내가 아닌 병원에서 급하게 오라는 전갈을 받았고 난 업무를 중단하고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스쳐지나갔다.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폭풍우에 대해선 그 어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어느 TV 에선가 본모습이 재현된다. 의사는 간호사를 나가라고 말하고 미안한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시킨 후 아이가 엄마의 태변을 먹은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양을 먹어 기도가 막혀 지금 인큐베이터 안에 있습니다. 최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고 위급한 상황인 만큼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난 그때 까지도 "충분히 그럴 수 있구나.. 나아지겠지" 라고 생각했다. 정말 무슨 눈치라도 챘어야 하는 건데, 난 어리석게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기다리는 2-3일 동안 병실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는 아내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이 좀 알아봐서 나한테 이야기 좀 해줘"...라고 말한다.
난 할 말이 없었고 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인 것 같다. 서서히 심장이 가빴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계속되는 한숨들. 혹 지난날 나의 과오로 신은 응당한 대가를 나에게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마음속 기도를 외쳤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과거 나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한 번도 종교를 가져 본 적 없는 신 에게...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하루하루 아이의 인큐베이터안을 지켜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잘못해서 신은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꼼꼼히 따져 보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아픔을 한 번 준 게 있는데 그것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질풍노도의 시기에 고고장 다니려고 코 묻은 돈 뺏들어 유흥비로 쓴 그것이 이런 고통을 받을 정도의 죄인가. 하늘에 대고 목 놓아 울면서 물었다. 메아리 없는 울림 속에 내 마음속으로 난 선을 하나 그었다.
신은 없다. 설사 신이 있다면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가슴으로 그 아이를 묻었다. 살면서 두 번째의 시련이였다.
이번 달 독서모임의 책은 오강남교수의 ‘예수는 없다’ 라는 책이다.
이 책은 반어법적인 제목으로 인해, 또한 도입부에서부터 기존의 신앙관을 문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로 규정짓고 종교 다원주의를 과감히 소개함으로써 기독교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예수는 무조건적으로 믿음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에 입각한 삶의 스타일’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친 ‘성령의 사람’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길벗’이 되어 그와 함께 그가 걸어갔던 ‘남을 위한 존재’의 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성경안의 내용이라는 것이 비역사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신화 와 믿음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하는 질문 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 처럼 된다는건 , 신 처럼 자율적이고 자유로워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이라는 것이 결국 유대민족의 민족 서사시 형태로서 내려오는 역사기록이자 집단지성의 응축이다. 유대민족의 집단계율을 지켜나가며 실천을 하면 당신도 신과 함께갈수 있는 길벗이 될수 있음을 약속한다.
책의 말미엔
여담이지만. 우리가 어느 종교를 갖게 되는 것도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만약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면 카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독일에서 났으면 개신교인이 되었을 것이며 이란에서 태어났으면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태어났으면 흰두교가 되었을 것이다 라는 말도 저자는 남겨놓는다.
P 100.
인간의 ‘원죄’ 를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신이 금한 실과를 먹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본성적으로 죄인들이다. 하는 식이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 조상이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는 셈이다. 지독한 연좌제에 난 묶었는가?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고통의 시간이 셀 수 없이 쌓이다 보면 임계점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의식이 확장되는 순간. 지금은 모든 고통이 나를 공부시킨 거라고 받아들이는 지점. 한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원망을 내려놓았다. 아마 그런 풍파를 겪지 못했다면 세상 잘난 체하며 얌체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내 어머니가 평생 새벽마다 부엌에서 대접에 찬물 떠 놓고 칠성 기도를 올리진 않았지만, 간혹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한 달에 한번은 꼭 절에 가서 자식의 앞날에 대해 불공을 올렸다고 한다. 생각이 깊지 못할 때에는 "기도 한다고 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비유가 이 책에도 나온다.
P 352.
밭에 나가 밭 갈고 있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뭔가 빌어서 객관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는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허나 궁극에는 "인간으로서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변하는 건 삶에 대한 여유가 그리고 타인을 보는 시선이 훨씬 넗어진 후였다. 무신론을 떠나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오래 전 <자조론>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부터 약 150년전 1859년 찰스다윈이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모태인 <정치경제학 비판서문> 을 발표하고 그 해에 새무얼 스마일즈 <자조론 Self Help> 이 출간 되었다. 자조론은 이렇게 시작된다.
” 타인의 도움은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스스로의 도움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이 문장을 읽고 느낀 건 어떤 어미에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조력자는 바로 "역경"은 아닌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건 "신에 대한 간절한 믿음 과 간절한 기도"를 아무리 애원해도 신은 인간적으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변치 않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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