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과의 조우
나의 학창시절만 해도 주류의 음악은 단연 팝송 이였다.왠지 K-POP은 수준이 떨어지는 그리고 통상적인 산파타령에 신물을 느낄때가 있었다. 그러나 서구음악이 우리의 귀를 점령하고 있을때 우리 고유한 정서를 내포하면서 음악적 정체성을 이어나간 가수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누굴까?, 단순히 음악사적 맥락은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늘 궁금했었다.
팝을 대신할 정도로 국내대중가요의 부상의 씨앗은 무엇 이였을까? 그건 생각컨데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편안한 음악의 한 축 과 극도로 정제된 시 적인 가사, 푸념 하듯이, 혹은 담담하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 과 감수성이 풍부한 뮤지션들의 노래라는 다른 축. 그러한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면서 읽어 본다면 나름 신선한 시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당대의 사람들의 정서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면에서 사람들과 높은 수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고 향유되는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주류의 음악 만이 아닌 소수 약자들의, 혹은 공공선을 지향하는 이들의 음악들. 그들의 노력들.그들이 아마도 한국 청년 문화를 언더그라운드로 말없이 지원했던 주인공들이다.
후술하겠지만 산울림이라는 밴드를 통해 산울림 이전의 가요들은 가슴저편의 위안을 노래한 것들이 많다면 산울림의 노래는 노래속에서 위안을 찾는것 과는 다른 ‘자기발견’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자기를 새롭게 찾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그런 능동적 삶의 지표를 청년들에게 제시하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 생각도 든다. 그들의 음악이 결국 여러 형태로 뻗어나갔지만 동물원이 가장 잘 이어 받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감출수 없다.
1960년대
이미자 - 엘리제의 여왕
남자는 산업역군으로 성장의 선봉장으로 포장되었지만, 시름과 눈물을 삼키며 가정을 지킨 여인들은 언제나 뒷전에 가려져 있었다. 바깥양반의 빛에 가려진 집사람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였다. 이미자 가 있었던 그 시절 바로 우리네 어머니가 살았던 그 시절 국가가 제시한 폭력적인 지상과제인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은 한과 설움을 삼켜야 했다.
헤일 수 없이 / 수 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 울다 지쳐서 / 꽃입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아가씨.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당한 사실도 모른체 이곡을 불러달라고 주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전직대통령은 이미자의 이 노래를 애창하기도 했다. 무엇이 왜색인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무엇으로 고통을 달랬을까? 이미자 노래의 슬픔의 위안이 있었기에 우리는 사회경제의 성장통에서 훌쩍 벗어날 수 있었다. <여자의 일생> 같은 노래는 내 어머니가 듣고 고통을 참으면서 네 아버지랑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하나 더 이미자의 창법은 꺽기나 굴려 부르는 기교가 없다고 한다.이러한 자연창법 때문에 이미자 노래는 처음 버전이나 나중에 부른 버전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이미 중년을 넘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나오는 선이 굵은 저음의 목소리 “최백호” 의 노래들은 젊었을때 녹음한 노래보다 요즘 녹음한 노래가 더 좋은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배호 - 혼으로 노래한 가수.
배호의 노래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릴때면 배호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우산 쓰며 걸어가는 친구가 바로 배호였다. 비 라는 테마는 슬픔과 우울의 정서와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 대중가수 가운데 누구보다 비로 표현되는 비애감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1971년 스물아홉에 요절한 배호다. 6년간 250곡 가운데 비와 관련된 노래가 30곡이 된다.
돌아가는 삼각지,누가울어,안녕,울고싶어 등..
1967년에 이미 신장암을 앓고 있었고 그는 건강이 호전될 때만 녹음을 할수 있었다.
고통을 씹어삼키는 듯한 애절한 톤, 가늘고 구슬픈 통곡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비탄조가 그의 건강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런 그의 삶 속에서 강한 호소력이 니온것이다. 그의 특징은 저음에서 바로 2옥타브 3옥타브로 넘어가는 하이톤으로 바로 솟아오른다. 이러한 목소리 자체가 바로 불세출의 가수라는 칭호와 더불어 매혹의 절창에서 비롯된다.
광복군의 아들로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나 그의 외삼촌인 MBC 초대악단장으로 부터 드럼과 노래를 배웠고 나이 21살에 밴드에서 탑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음악계에 소문이 자자하게 만들었다. 이후 1964년 KBS 악단장과 연을 맺고 65년에 "누가 울어", "안개속에 가버린 사랑"이 히트를 치고 67년에 "돌아가는 삼각지" 로 스타덤에 오른다. 그리고 이 노래를 녹음할때는 몸을 가눌수가 없어 의자에 앉아 가래를 밷어가며 녹음을 마쳤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의 마지막 노래 "마지막 잎새" 는 노래 가사만큼이나 그의 사연을 이야기 한다.
배호는 목소리 와 혼의 가창 뿐만 아니라 비주얼로도 당대를 빛냈다. 한국 대중 가수 중에서는 처음으로 금태안경을 썼으며 중절모는 지성미를 풍겼다.
1970년대.
어처구니 없는 "전체주의적" 적 정책은 1970년대 중후반의 대중음악계를 공백으로 만들어 놓았다.
1964년 키 보이스가 로큰롤(당시에는 일본식의 조어 ‘그룹사운드’로 불렀다.) 로 <그녀 입술은 달콤해> 를 발표를 시작으로 수많은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중현을 제외하고 대부분 번안가요를 가지고 국내가요계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중 <해변으로 가요> 가 일본 노래의 번안가요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없다. 신중현이 이끌던 더 맨과 히식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지향하는 음악을 추구했다. 아마도 <레드 제플린-지미 핸드릭스> 의 영향이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미국 팝 음악의 역사는 사실 매우 심플하다. 하단에 직접 그려 보았으니 참고해 보길 바란다. .
그룹 사운드 반대쪽에는 포크 진영의 사람들이 있었다. 1968년 송창식과 윤형주의 트윈폴리오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그러나 이들 역시 번안 곡들이 주류였다. 1970년대가 되면서 자신들의 노래를 담은 한대수와 김민기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 후에 많은 뮤지션이 탄생한다. 그러나 1970년대 대중음악은 록과 포크가 아니가 "대마초 파동" 과 "가요 정화 운동" 이였다. 이때 100여명이 넘는 가수들이 활동을 정지당하고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청년문화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서구 사회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갈수 있었던건 끊임없는 '자체갱신', '내부혁명' 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이다.그들의 예술을 통해 '청년 문화' 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고 그들의 저항정신과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시대는 흐르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록과 포그가 시작되기도 전에 "청년 문화" 의 명백한 후퇴가 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음악적 암흑시대가 아니라 시대의 암흑기라고 봐야 한다.
신중현
<비속의 여인>, <커피 한 잔>,<미인> 그리고 이정화가 부른 <봄비> 등 히트곡 제조기 라는 별명을 얻게 된 그는 요즘 맹위를 떨치는 대형기획사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으로 펄시스터즈가 부른 <님아>,<커피한잔> 또한 그는 김추자가 가진 비음 섞인 육감적 보걸 을 가지고 한국적인 소울음악을 구현하려고 했다 <님은 먼곳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가 그런 시도에 있었던 노래였다.를 가요계에 등장 시킨다. 그는 또한 김정미를 통해 레드제플린이 추구한 '사이키델릭 사운드' 를 한국에서 추구하기 위해 김정미 를 앞세워 음악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그런 시도가 없었다면 한국 록음악은 발전하지 못했으리라. 여하튼 그가 기억하는 탄압하는 시작은 1972년 유신정권 출범 직전이다.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지시를 거절하고 <아름다운 강산> 을 만들었다. 신중현은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했고 정중하게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그는 괘심죄에 걸려 공연마다 단속을 받고 대마초 수괴로 지목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80년이 될때까지 철저하게 야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한국 록음악의 단절이고 긴 시련이였다.
한대수 <물좀 주소>
1969년 자신이 부를 노래를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 싱어송라이트로서 이 행위가 한국에선 무척이나 낮선 것이였다. 앞서 말한대로 '한대수'와 '김민기' 의 영향으로 많은 싱어송 라이트 들이 한국에서 탄생하게 된다. 그의 노래 <물좀 주소> 와 <바람과 나> 는 청년의 고독 그리고 외로움 <행복의 나라> 에서는 자신의 이상향을 꿈꾸며 노래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여전히 낮선 이방인 이였다.
그의 노래 그 <멀고먼 길> 에는 그의 불운한 가족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초대학장을 지낸 '한영교' 를 할아버지로 둔 명문가?의 자손이다. 사실 명문가라는 단어는 참어로 싫어하는 단어이다. 부의 되물림이자 권력의 소유자 같은 냄세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단어는 거추장 스럽다. 아버지 한창석은 미국 코넬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뒤부터 그의 불운은 시작되었다. 핵물리학자를 꿈꾸던 '한창석' 은 미국에서 실종되었다.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그의 어머니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게 되고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 없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가 고등하교 2학년 때 FBI 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국말은 전혀 할수가 없고 뉴질랜드에서 백인 여성과 살게됐지만 정착하지는 못했다. 그의 노래 바람과 나 행복의 나라는 뉴질랜드의 흐름한 골방에서 탄생한 노래들이다. 그의 두번째 앨범 고무신이 발표되었지만 그 역시 금지되고 만다.
애틋한 감성이 그 에게로 흐른다. 잠시 그의 노래를 You Tube 에서 찾아서 들어보았다. 잠시 산책을 해야 할 것 같다....
송창식.
날마다 홍대 교정에서 노래를 부르던 청년이 있었다. 홀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목소리가 기가 막혔다. 당연히 모두 그를 홍대 재학생이라고 여겼지만 그는 고등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 중퇴한 송창식이였다. 그의 빼어난 노래솜씨는 자연스례 소문을 타고 홍대 음악감상실에서 세시봉이라는 사회를 보는 이상벽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합류하게 된다. 그는 2집 발표때 자신만의 노래를 작곡하게 되고 <왜 불러> 와 <고래사냥> 을 통해 청년문화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1980년대 참새의 하루는 송창식음악의 결정판이였다. 이 한장의 앨범에 록과 포크 국악 발라드 등 온갖 음악장르를 선보이며 이를 각기 다른 개성으로 돋보이게 했다. 어떻게 보면 난 한국가요계에 조용필 과 송창식이 유일하게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 내는 가수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장르의 곡도 소화해 내는 유일한 장(아이패드에서 쓰다보니 한자가 안써진다.ㅜㅜ) 의 소유자들..
김민기.
김민기의 1971년에 나온 1집 앨범은 신화와도 같은 앨범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저항 가수의 이미지로 1980년대 노래운동 진영의 큰형님 같은 존재로 회자 되곤 한다. 그의 노래들은 "반체제","저항" 같은 단어들로 우리의 뇌리속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아침이슬은 '양희은'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의 음박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양희은 역시 1980년대 초반 암 선고를 받고 두 차례에 걸친 암 수술을 받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후 그녀의 세계도 더 깊어져 갔다. 그녀의 노래 <하얀 목련> 과 <한계령> 은 깊고 간절한 세계를 만들어 냈다. 난 그의 첫 앨범 중 <가을편지> 는 가을이면 꼭 들어야 하는 노래가 되었다. 그의 중후한 목소리에 가을은 그렇게 깊어져 간다.
우리는 그의 음악도 좋지만 그가 프로듀싱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도 한번 살펴볼만 하다.
노찾사는 서울대 노래모임과 이화여대 노래패가 결합하여 만든 그룹이다. 그 중심에는 문승현이 있다. 그는 <그날이 오면>,<사계>,<영산강>,<이 산하에> 등의 노래를 만들며 노동운동 진여에서 오래도록 사랑받게 만들었고 80년대 노래운동 자체를 이끌게 된다.그 후 2집<솔아솔아 푸르른 솔아>,<광야에서> 는 문승현의 품격있는 곡들과 안치환의 피끊는 비장함이 담긴 곡들이 잘 조화를 이뤘다.
이장희 - 그건 너.
조영남의 노래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처음 음악을 시작한 '이장희' 는 '조영남' 이나 '송창식' 처름 풍부한 성량을 가지지도 못했고 윤형주 처름 섬세한 보컬도 아니다. 그리고 '김세환' 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꾸미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로 투박하게 노래를 했고 기교보다는 느낌을 중시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만든 음악들은 그의 노래 스타일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1970년대 초중반 가죽 재킷을 입고 담배를 물고, 오트바이를 타고 다녔던 것부터 격식과 틀을 강요하던 당시에는 파격 이였다. 그가 제제를 당한 결정타는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어른들의 눈에는 삐딱한 반항의 젊음으로 비쳐졌지만 유신이라는 군사독제 시절의 숨 막히던 청춘들은 이장희로 부터 자유와 일탈의 쾌감을 맛보았으리라.
<그건 너> 라는 노래는 포크도 록도 아닌 '이장희' 식 음악이였다. 당시 포크음악이 품고 있던 서정성과는 거리가 있었고 당시 유행하던 락 음악과도 엮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포크 락으로 적당히 포장할수 있겠지만 그 범주에 꼭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들어다 보면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 운운해대는 것은 당시의 노랫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추상적이고 시적인 가사들이 만연하던 시절에 이장희는 당시 젊은이들이 말하고 접하는 현실을 그대로 노래로 옮기는, 이를테면 자유로운 구어체 어법으로 들이댄 것이다. 그건 충격이지만 아마도 동물원이 추구하던 음악이 바로 이런것이 아니었나 하는 합리적 의심도 나는 해본다. 그리고 <한잔의 추억> 은 또 어떠한가? “마시자 마셔버리자” 그건 바로 일탈의 방점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겠다는 반발이요 반항 아니던가. 그리고 난 책을 읽다 “벅스” App 에 들어가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 을 들어보려고 보았는데 <한찬의 추억> 이 19세 로 표시가 되어 있다. 안타깝다.
포크는 단어적 의미로는 민요를 가르킨다.
민요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게 노랫말이다. 노랫말이 강조되려면 사운드 즉 악기가 주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악기가 많으면 연주를 듣게 되기 때문에 악기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포크 보다는 1960년대 부터 모던 포크가 대학가로부터 태동하게 된다. [마르쿠제]를 좀 읽고 공부좀 한다는 애들이 집회를 열면 노래가 필요한데 그 노래가 포크였다. "We shall overcome - 우리 승리하리라", "Blowing in the wind - 바람만이 아는 답" 대표적인 반전 가요다. 그렇게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포크인데 그것을 우리나라에서 김민기 가 시작을 했다는 것이고 그 뒤를 이어 송창식 그리고 이장희 등도 이어갔지만 그는 조금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포크 와 록 을 결합시킨 포크 록 사운드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는 이장호 감독 <별들의 고향> 에 사운드트랙을 맡아 최고의 순간을 누린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한잔의 추억>,<비의 나그네>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산울림 - 아니 벌써.
산울림의 등장은 정말 느닷없이 이루어졌다. 외부와의 접촉없이 3형제가 함께 놀며 만든 노래들이 1977년을 뒤흔들었다. 1970년대 한국대중음악계를 흔들었던 "대마초 파동"에도 살아남아 그들이 그남아 명맥을 유지할수 있게 만들었다. 70년대 초반의 찬란한 음악적 유산을 단절되어 전해지지 않았지만 트로트 고고 같은 변형된 트로트 형태로 발전시켰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김창훈은 무이 란 이름으로 1위를 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탈락하고 동생 김창훈이 써준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떻게> 가 대상을 수상한다.
그들의 어린시절로 들어가 보자. 어릴 적 가정환경은 좋지 못했다. 부모의 금실이 좋지 않아 늘 불안정했고 삼형제에게 아버지는 무섭기만 했다. 김창완은 그 시절 늘 불안정했고 삼형제에게는 아버지는 무섭기만 했다 김창환은 그 시절을 “달아나고 싶었고, 공상에 빠지곤 했고 늘 혼자 있고 싶어했다.커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다. 산울림 시절 동요를 많이 쓴 것은 이런 환경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펄 시스터즈의 <님아> 와 남진 의 <님과함께> 의 노래가 길가던 행인들의 노래였듯이 산울림의 <아니 벌서> 도 아니벌써 해가 솟았나 하면 목청을 높이게 된다. 같은 해 1977년 영국의 펑크 밴드 섹스피스톨의 혁명적인 소용돌이와 함께 이 노래도 한국 최초의 펑크 송이라는 타이틀로 불리게 된다. 아마추어리즘으로 규정되는 산울림의 음악이 왜 그때 젊은이들을 삽시간에 사로잡을수 있었을까? 그 시절의 국내 대중가요는 청춘의 요구를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 록은 트로트와 만나 청춘의 외침을 상실했고 자유분방한 노랫말도 없었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여전히 음악하면 팝송을 들었다.어쩌면 우리가요가 제기능을 못해게된건 박정희 때문 만은 아닐까?
그후 <문좀 열어줘> 라는 파격적인 사운드와 파격적인 노래로 소문이 나고 그들의 앨범의 첫곡 <아니 벌써> 는 그렇게 한국 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심수봉 - 트로트의 힘.
묘한 느낌과 신비한 느낌의 소유자 그리고 대학가요와 성인가요의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 사람. - 이문세.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 에서 명지대 경영학과 재학중이던 그녀가 "그때 그 사람" 을 불렀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포크나 록 두 장르가 주류였고 "트로트가 어떻게 대상이 될수 있는가?" 하는 분위기 였다. 수상과는 다르게 대중들 사이에서 심수봉의 노래는 순식간에 애창곡, 히트송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 해 바로 지구레코드와 200만원을 받고 음반체결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중요한건 그의 노래는 물밑으로 대중의 가슴을 파고든 것이다. 화려한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려진 뒷편에서 무게가 불어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밑과 뒷편은 바로 심수봉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녀의 노래는 외형적 히트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천만의 가요가 되곤 했다. 이문세가 말하는 그 묘함이 물밑과 뒤편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심수봉이라는 가수 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다.
박정희 사건 블행히도 '궁정동 안가' 라는 잊지 말아야 할 곳에 있게되 후로 가수 활동은 끝이였다. 그리고 1983년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 은 하필 전두환 대통령의 영부인과 같은 이름 탓에 가수 방미가 부른 것 처름에서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로 제목이 둔갑되었다. 록의 대부 신중현과 포크의 대부 김민기가 그랬듯 심수봉도 정치의 피해자이다.
1984년에 공개된 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삼천만 대중의 애창가로 선정이 되었다. 우리모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꺼내지 못하지만 사석의 자리에선 모두 다 끄떡이는 공감을 창출한다. 실감나게 와 닿으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언어들 그 경계선상의 아리아에 우리는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노래방에서 행여 누군가 심수봉 레퍼토리를 선택해 마이크를 잡으면 일제히 환호를 보내고 노래에 대한 그 사람의 안목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 자주 목격했던가.
하늘이 내려준 비음 과 바이브레이션 조금은 불규칙적인 호흡 가수로서의 각별한 재능은 절대적이다. 또하나 그녀의 특징은 트로트가수로서는 매우 드문 작사작곡 능력을 빼놓을수 없다.
"백만송이 장미", "젊은 태양", "사랑밖에 난 몰라", "미워요", "무궁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모두 그가 작사작곡한 것들이다. 또한 그녀는 피아노 뿐만 아니라 드럼도 마스터해 그 림감각을 익힌 것이다. 본인은 한사코 "난 전성기가 없었던 가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는 늘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히트곡이 수 없이 많지만 2002년 그녀가 뉴욕에 머물면서 드럼을 연마하고 연습한 "백만송이 장미" 라는 노래를 첨부하고 싶지만 친구들은 늘 나의 심수봉의 미워요를 부른것을 기억하곤 한다. 철없던 시절 심수봉은 우리 가슴의 애인이였다.그는 트로트를 넘어 당시에 대중음악계에 '작가' 란 칭호를 수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여성 음악이다.
그러나저러나 토요일 아침 너무 우울한 노래만 들어서 그런지 마음이 편하질 않다.
이럴때는 볼빨간 사춘기 노래를 하나 듣고 기분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1980년대.
여전히 80년대의 대중음악계는 암울할 것 같았다. 놀라운 재능을 소유한 뮤지션들은 자취를 감추고 저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유신정권은 물러났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은 군부정권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그러한 어둠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언더그라운드. 1970년대 김민기와 조동진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방송을 기웃거리지 않고 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며 대중과 만났다. 그 중에서도 들국화의 등장은 또 다른 청년문화를 대표했고 라이브 문화를 정착시켰다. 70년대 선배들이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공연했다면 이들은 대중과 함께 호흡했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 가요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 나의 애창고 18번을 부른 가왕 '조용필' 난 그의 노래를 사랑한다.
조용필 - 단발머리.
사람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누구냐 묻는다면 단연코 조용필일 것이다. 그건 아마도 아바가 17곡의 곡으로 뮤지컬 맘마미아가 탄생했다면 조용필의 노래중 히트한 노래만해도 50곡이 넘는다. 뮤지컬 3편을 만들고도 남는다.
80년대에는 단연 가왕 조용필이 휩쓴다. 물론 유재하,이문세의 앨범을 통해 한국 팝 발라드의 세계가 열린것도 80년대 이지만 미국에서는 70년대 "엘튼 존" 을 통해 팝 발라드가 유행하게 된다. 여하튼 이때 주현미 같은 가수도 새로운 트로트 스타로 등극하며 대중들의 가슴으로 찾아온다. 사실 이때 이용,전영록,김수철,송골매 뭐 많이 있다. 그러나 ...다 뒤로 하자.
그의 앨범 중 1집 과 4집 7집이 최고의 명반이다. 시간 나실때 꼭 한번 들어보시길..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창밖의 여자>,<단발머리> 모두 다 그가 만들었다. 그 역시 대마초 파동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이 시점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활동정지를 당한 기간동안 판소리와 민요를 배우는 고행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탄생하게 되어 1980년 이전과는 다른 굉음의 표효를 갖추어 컴백한다. 그의 노래는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팝 발라드(단발머리, 창밖의 여자) 록과 디스코 발라드,트로트(미워 미워 미워, 허공), 포크(친구여) 민요(한오백년) 등이 두루 담겨진 1집앨범은 그의 음악인생의 축소판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모든 장르를 건드렸다는 형식주의적인 터치가 아니라 하나의 곡에다 여러 장르를 섞어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그는 <창밖의 여자> 로 스타로 등극하자 각 부분 최고 연주자들을 불러 모아 “위대한 탄생” 밴드를 결성했다.
4집에는 <못찾겠다 꾀꼬리>와 <비련> 이라는 시대의 명곡이 들어있다.
7집에는 어제 오늘 그리고 , 그대여,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등..
그가 여전히 많은 뮤지션들로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끊임없는 자기혁신 그리고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움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실험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송골매 - 어쩌다 마주친 그대
1978년 1회 강변가요제는 가요제 역사상 가장 많은 스타를 배출한 대회로 평가를 받는다. 구창모가 있었던 홍대 밴드 블랙 테트라(열대어), 배철수가 있던 항공대 밴드 활주로 가 참여하였고 벗님들, 열기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주병진 과 왕영은도 이때 나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송골매의 노래가 한국적 록에 가장 가깝게 적응을 하고 시대를 이끌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와 <모두 다 사랑하리>는 모두 구창모가 작곡을 한 노래로 지금도 밴드들이 밴치마킹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몰라도 송골매 전설의 상당지분은 구창모에게 있음은 명확하다. <세상만사>는 배철수가 만든 노래이다. 1991년 그해 터진 PD사건 매니저들에게 돈을 받은 PD 들이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가요계에 염증을 느껴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여하튼 송골매에게 "가요제 에서 배출한 최고의 록 밴드" 라는 칭호는 아깝지 않을 것이다.
들국화.
역사적인 들국화의 데뷔엘범(1985) 표지를 장식하는 네 명의 젊은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이 선 이례로 명반 순위에서 늘 1위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산울림의 앨범과 유재하의 앨범은 두 세번째를 차지했지만 들국화의 입치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그저 음악이 좋아서 네 명의 청춘이 순수함으로 함께 만든 앨범이 그 토록 대중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차지할지 알고 있었을까?
1980년 최성원의 지휘아래 네 명의 색깔이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최성원의 포크적인 감성 , 전인권의 발가는 소리같은 폭발적인 음성 그리고 순수한 외침이 <그것만이 내 세상> 에 묻어 나온다.
젊은날 그 노래 들으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노래밖에 부를수 없었던 그것뿐인 내 세상 이였음을..
김현식-비처름 음악처름.
난 여태 이 사람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정녕 몰랐다. 그냥 젊은 시절 일찍 요절한 유망한 가수정도로 인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속살을 들여다 보니 이 가수는 그냥 넘어가선 안 될 가수였다.
노래하면 이지러지는 비애와 고독감이 질펀한 가수. 목소리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비참 정서의 방점. 갈라진 목소리로 처참하고 거칠게 넋두리를 토해내는 가수의 대명사. 바로 김현식 이다.
김현식은 들국화의 '전인권' 과 함께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목소리" 였다. 들국화가 <그것만이 내 세상> 을 소리쳐 부르고 있을 때 그는 <비처름 음악처름> 을 부르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의 첫 자작곡들은 그다지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했어요> 가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 언드그라운드의 스타가 되었고, 이 후 그는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 생각으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시작은 여기서 부터다. 기타 김종진, 베이스 장기호, 키보드 유재하, 드럼 전태관으로 이루어진 이 대단한 밴드는 김현식의 세 번째 앨범을 함께 만들게된다. 당시 록과 블루스 외에도 재즈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현식은 타인들과의 호흡으로 완전한 밴드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지칭한 언더그라운드 란 무엇인가? 땅위의 지배는 조용필이 했다면 땅밑에는 김현식이였다고 할까? TV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서 자기 음악세계를 구현할려고 했던 음악가들.물론 그 역시 대중이 공감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테마에 집중해 “사랑의 가객(哥客)” 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사랑의 가객이 아니던가? 여기서 중요한건 바로 객이다. 언제나 한발 물러선 입장들. 그의 후련하고 거친 보컬과 풍부한 맬러디는 그의 시대를 이미 예고했었다.
박성식이 만든 <비처름 음악처름> 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김종진 장기호의 곡들 그리고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등이 있는 3집 앨범 이였다. 자신도 작곡활동을 하며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보컬또한 일품이였다. 하지만 그의 마약 복용등 불안정한 생활이 지속되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전성기는 짧게 끝나 버리고 맴버들은 각자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4집 ,5집이 별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고 6집 발매를 준비 하던중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요절 소식과 함께 <내 사랑 내곁에> 는 말 그대로 국민가요가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들의 80년대 영광은 빛을 잃어가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시대는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김현식 신화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그 시절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온전히 전하는 언더그라운드으 별이었으니 홍보와 마케팅을 넘어 순수음악으로만 도전하려는 많은 뮤지션들의 숭배자가 되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 가 있었기에 유재하 와 봄여름가을겨울역시 있을 수 있었다.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한국의 음악계는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고 했다. 1987년 25살의 새파란 나이에 못다 핀 꽃 한송이 처름 세상을 떠난 유재하.
유재하는 드물게 클래식을 전공한 음악인이였다. 한양대 음대 작곡과였는데 전공과 달리 그의 관심은 순수음악이 아닌 대중음악이였다. 당시에는 유재하 처름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뮤지션들이 그리 많치 않았기에 그의 재능은 두드러질수 밖에 없었다. 그의 1집 앨범 뒷편에 기록된 한 줄 ‘작사작곡편곡 유재하’ 는 일대 충격 그 자체 였다. 당대에도 작곡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쓰는 것 외에 그 평면적인 악보를 곡으로 옮기는 실제 작업인 편곡까지 해낸 음반은 유재하 이전에는 없었다. 편곡을 스스로 한다는 것은 앨범을 완전히 자기작품으로 빛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음악적 자주의 실현이다. 아마도 그가 그럴수 있었던 중학교 시절,퀸,비틀즈 같은 대중음악을 듣고 어려서 부터 피아노,첼로,바이올린,기타 등 거의 모든 악기를 다를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스스로 편곡을 할 수 있는 토대였다. 아마 그가 작곡을 공부하면서 클래식의 [[화성학]][2]을 터득한것도 한몫 했으리라.그의 재능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에 들어가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탄생의 맴버가 된다는 것은 해당 포지션에서 최고의 위치가 아니면 들어갈수가 없었다. 보통 내노라하는 베테랑 연주자들이 몸다는 위태한 탄생에 갓 20대 넘은 젊은이가 들어간 것이다. 그기다 그는 작곡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훗날 자신의 유일한 앨범의 표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 도 조용필이 먼저 부르게 된다. 하지만 위대한 탄생에서는 자신의 졸업때문에 그렇게 오래 있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자신의 곡이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결합을 시도한 것인데 그것을 조용필 과 김현식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다른 노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도 한번 들어보시라.
대학졸업후 유재하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가입하게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였기에 김현식은 유일하게 유재하에게만은 손찌검을 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역시 25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그가 죽은 날이 김현식과 죽은 같은 11월1일이다. 그래서 에픽하이가 <11월1일> 이라는 노래로 그들을 추모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1,2집의 실패로 가슴조리며 있던 이문세에게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3집앨범<난 아직 모르잖아요> 에 자신이 만든 <그대와 영원히> 를 선물해 준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를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기존 한국 대중가요가 소위 '뽕끼' 를 제거한 음악을 최초로 구현했다는 데 있다. 그의 노래 대부분이 약간 슬프고 애잔하 느낌을 주지만 산파조는 아니다. 여하튼 그와 함께 작곡가 이영훈은 한국 발라드 가수들에게 끼진 영향은 대단하다. 현재까지도 그의 1집과 이문세 4집의 발라드 노래들을 여전히 한국 발라드 가수들은 선호하고 따른다.
그의 죽음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는 나머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여전히 열리고 있다. 이 대회는 작지만 가장 내실 있는 가요제다. 가요제 취지에 맞게 혼자서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연주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요제를 통해 가요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우리가 잘 알고있는 유희열,김연우,옥상달빛이다.
봄여름가을겨울 - 어떤이의 꿈
김종진과 전태관 둘만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시절부터 이들은 돋보였다. 작곡에 특히 재능이 뛰어났던 유재하가 많은 곡을 만들어 왔지만 김현식은 그 가운데 <가려워진 길> 하나 만을 선태했다. 이에 자신의 음악을 하겠다며 팀을 탈퇴한 그는 그의 뒤를 이어 박성식이 투입되고 그가 <비처름 음악처름> 을 만들어 낸다. 떠난자와 남은 자 모두 훌륭한 노래 하나씩을 김현식에 선사한 샘이였다. 그후 여러가지 시간이 흘러 봄여름가을겨울은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가 호응을 얻으며 기대 이상의 반향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한국에서 본격적인 퓨전재즈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앨범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또하나 칭송받을 일은 바로 라이브앨범이다.
작정하고 재대로 만든 라이브 앨범이였다. 예를 들어 신중현의 라이브앨범은 그의 인기를 얻고 제작자가 몰래 녹음해 발매한 비공식 앨범이였고, 들국화의 라이브 앨범은 팬들을 공개스튜디오에 초대해 만든 일종의 공개방송 같은 앨범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제대로 만들고자 했으며 국내에서 라이브 앨범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최초였다.
그 후 여러장의 앨범을 냈지만 별 좋은 반응은 얻어내지 못하고 7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 가 히트를 기록했다. 이미 그들도 중년의 나이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중년의 여유가 묻어나오는 어깨에 힘을 뺀 작품이라 더 우리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태춘 - 시인의 마을.
<시인의 마을> 은 새로운 포크가수의 등장을 알리는 의미 있는 작품이였다.
그는 선배 음악인들에게는 없는 토속적인 정서가 있었다. 그의 시인의 마을은 당시 심의 를 피해갈순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무엇이 그리 두려웠던지 한 개인의 사색마저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게 했다. 바로 유신시대에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였다. 이때부터 문제의식을 느껴오던 정태춘은 1990년대 사전 심의를 거치지 않는 불법음반을 발표하며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 혼자였다. 함께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대해야할 음악인들은 외면했다. 그의 길고 외로운 싸움 끝에 사전 심의제는 페지됐다. 그렇게 그가 있었기에 한국대중음악의 전성기라고 하는 시대가 열릴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시인의 마을을 한번 들어보시라.
한국적인 멋이 듬뿍 들어간 노래와 서정적인 가사가 일품인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런 그의 움직이며 실천한 사회운동이 있었기에 90년대 대중음악이 전성기를 맡이할 수 있었음은 분명한것 같다.
동물원-거리에서
이들은 동물원이라는 이름 이전에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 라는 팀명을 가질 뻔 했다. 동물원의 적극적인 지원자였던 산울림의 김창환이 제안한 이 이름은 이화여대생 들에게만 팔아도 천 장은 팔수 있을 것이라는 장난스러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 만큼 동물원의 시작은 농담같았으며 진지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자신의 노래는 그저 하나의 재미였으며 놀이 였으며 좋은 취미 였다.각각 고등학교 친구,대학동기 등이 모여 결성한 이 동물원의 구성원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노래들을 모아 한 장의 기념 앨범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동물원은 이렇게 철저하게 아마추어적 이였고 음악으로 생활을 영위 하겠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실제로 팀의 메인 보컬 이였던 김광석과 기타리스 이성우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맴버들은 음악활동과는 관계없는 직업을 가졌다. 그 후 이성우와 김광석은 1집과 2집을 끝으로 동물원을 나오게 된다.
사실 내가 이 그룹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이들의 노래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주류가요의 문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포크도 아니고 발라드도 아닌 동물원의 노래였다. 김창기는 일상생활에서 얻어낸 비범한 노랫말과 덤덤한 보컬로 동물원의 음악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잊혀지는 것/> 과 /<변해가네/> 으ㅢ 노래들은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아무나 쓸수 없는 가사들을 만들어냈고 이후 그들은 소심한 남자들의 섿계를 가장 잘 표현해는 작사가라는 호칭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이 동물원 이라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이데올로기 철장속에 산다는 의미 로서의 그 이름자체가 그들은 이미 회색분자 였다.
1집과 2집의 성공뒤에 여러음반을 내지만 서태지의 빛에 가리워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과연 좋은 노래란 어떤 노래인가?” 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김광석-거리에서.
어쩌면 김광석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고 싶다는 욕심에 이 책을 접했는지 모른다.
일년에 몇 번씩은 친한친구보다 더 많이 조우하는 그의 노래. 한국 모던 포크의 적자가 들려주는 노래는 맑고 향이난다. 그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면 언제든지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게 하고, 추억에 잠기게 하고 눈물을 짓게 하고 … 우리 삶 곳곳에 산재한 반성,후회,좌절,갈증,사색 그리고 용기를 자동으로 불러일으키는 무슨 감각장치를 달아 놓은 것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가수는 히트곡 중심으로 우리의 머리속에 기억되지만 김광석의 노래는 삶의 과정에서 겪는 감정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듣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레퍼토리로 함께 간직되어서 그러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 닥치고 조용히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깊이 묻어놓은 감정 한 가닥을 꺼내어 슬픔과 즐거움을 김광석이 입혀준다. 여하튼 그의 노래가 있는 한 우리의 그러한 감정패턴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김광석은 1982년 명지대에 입학하면 서 대학 동아리 연합 메이리에 가입한게 그 첫 시작이다.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바이올린을 비롯해 여러 악기를 배우고 합창단을 한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1984년 김민기와 인연을 맺게 되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맴버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바로 동물원과 합류한다. <거리에서> 는 많은 인기를 끓었고 두 번째 앨범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써> 역시 동물원 내에 있으면서 부른 노래들이다. 그가 동물원을 탈퇴한 이유는 자신만의 음악을 하기 위해서 나왔지만 맴버들과 소원해져 나온건 아니였다. 여전히 좋은 친구였고 언제라도 함께 노래를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광석의 이미지는 바로 3집 (1992)에서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조동익” 이라는 사람과 함께 작업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조동익 밴드의 정갈한 편곡과 세션으로 변화가 시작됐고 김광석 자신도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며 <나의 노래>,<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와 나른한 오후 등이 조동익이 제시하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그의 음악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옛 노래들의 ‘다시 부르기’ 작업이다. 정규앨범 만큼 중요한 대접을 받고 있는 두 장의 <다시 부르기> 앨범은 고전이라는 것에 대해 리메이크 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나는 가수다> 에서 보듯이 우리는 모든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준 의미있는 일이였다.
여담이지만 한번은 회사 임원들과 함께 하는 회식자리에서 조금은 거칠어지는 순간에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 흘러나왔다. 볼륨이 높지 않아서 가늘게 들려왔지만 참석자들 모두 가슴에는 임원의 이야기 보다 김광석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 묻히면 그만인 것을 /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 또 잊지 못해 세울까 / 창틀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 어제보단 커진 내 방안에 /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썻다 지운다 널 사랑해 -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임원은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눈치없는 누군가가 "아!" 하는 순간 더 눈치없는 누군가가 "카” 하면서 한숨을 뿜어댄다. 하이라이트는 어슬픈 쫄다구였다. 분위기를 살릴 요령으로
김광석 노래는 듣는게 아닙니다. 흡수되는 겁니다.! 건빠이!!!
그 이후 그 친구는 건배사는 커녕 그날 내내 불편해 했다.
다시 그의 노래로 들어가보자.
노래마다 곳곳에 산재하는 반성,후회,좌절,갈증,사색 그리고 용기를 자동으로 불러일으켜 주는 무슨 감각장치를 달아놓은것 같다. 그의 노래 중 "서른 즈음에"는 서른에 들어서는 감흥이 오질 않는다. 마흔이 다가올때 마흔이 훌 넘었을때도 그 감동의 물결은 같지만 다르다.
또 하루 멀어져 가고 또 매일 이별하고 있음에 ...
그날밤의 소주잔은 안주없이도 넘어가리라.
이문세 - 옛사랑.
이문세는 처음에는 가수 로서는 특별하지 않았다. 이문세 라는 이름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또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이름을 조금 알렸다. 어디까지나 방송인 이였을뿐 가수 로서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그가 방송에 들어오게된 계기도 카페등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하다 전유성에 의해 눈에 띄게 되고 그에 의해 방송에 들어오게된다. 물론 나는 행복한 사람과 파랑새가 조그만 반응을 얻긴 했지만 앨범 전체적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이영훈을 만나 3집 앨범 <난 아직 모르잖아요> 를 낸다. 이 노래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되고 유재하가 작곡한 <그대와 영원히> 도 공전의 히트곡이 된다. 4집의 앨범은 한국 팝 발라드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앨범이다. 음악이 말해주고 판매량이 말해준다. 3집부터 이미 호흡을 맞춘 이문세-이영훈-김명곤 이라는 가수-작곡-편곡의 환상의 조합은 4집에서 절정의 기량을 선사한다.
이문세의 앨범이 중요한 이유는 팝이 지배하고 있던 1980년대의 흐름을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해할수 없겠지만 당시 가요는 듣기 부끄러운 것 촌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문세와 이영훈은 1980년대의 그런 인식을 완전히 뒤집고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며 라디오에서 자연스레 팝이 아닌 가요가 흘러 나오게 하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그런 혁명과 같은 일들을 그들이 해 놓은 것이다.
신승훈 과 이승철.
신승훈은 대전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데뷰일도 유재하의 기일(11월1)에 맞춰 데뷰를 할 정도로 싱어송 라이트로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서울로 상경하여 곧 김창환 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김창환은 DJ 출신의 프로듀스로 오랜 DJ 경력으로 대중적인 감각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눈썰미를 자랑했다. 그는 자신의스타일과 이승철이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앨범은 신승훈에게 맡기고 편곡은 김명곤에게 맡겼다. 결국 이런 선택이 옳았음이 히트를 통해 입증이 되었다.
이승철은 부할의 리더인 김태원과 사실 부딛힐수 밖에 없었다. 이승철은 야망있는 음악인이였고 부활의 노래는 김태원이 작곡을 하는 그런 밴드였다. 그런 그가 부활을 나와 신인 작곡가 박광현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부터 롱런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마지막 콘서트>,<소녀시댜> 는 최고의 인기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의 재능은 자신의 앨범을 구상하고 그 구상을 잘 구현해줄 조력자들을 찾는데에 재능이 있다는것이였다.
장덕 - 님 떠난 후.
1977년 제1회 서울국제가요제 에 진미령이 <소녀와 가로등>이란 노래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당시 대회규정상 작곡가도 함께 무대에 올라야 했다. 함께 무대에 오른 작곡가는 바로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고1여학생 이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녀와 가로등>을 중학교 2학년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미령이 노래하는 동안 그는 반주를 맡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그 노래는 그렇게 입상을 하게된다.
이 전설적인 일화에서 <장덕>이란 인물의 천재 신동으로 연결하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닐것이다. 그의 이런 재능은 불운한 어린시절로 인해 발견된다. 첼로 연주자인 아버지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덕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불화를 보며 커야 했다. 초등학교때 오빠를 통해 기타를 배운 장덕은 음악을 통해 외로움을 달랬다. 소녀와 가로등 에서 전해오는 외로움과 슬픔은 이같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혼한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장덕은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음악활동을 이어가지만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나버리고 향수병까지 찾아오게 된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하고 오빠와 함께 부른 <나너 좋아해, 너나 좋아해> 가 큰 인기를 모았고 <님 떠난 후> 까지 큰 히트를 기록한다. 부모의 이혼 뒤 한번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이 불안한 영혼에게 계속된 우울증과 불면증을 더 심화 시킨다. 겨우 28살의 나이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그는 사망한다. 그리고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6개월뒤 설암으로 그의 오빠도 동생을 따라간다.
그 역시 한국 가요계에서 보기 드문 싱어-송 라이트 였을뿐만 아니라 앨범 전체를 통재하고 조율할수 있는 프로듀스였다. 당시 영화음악 작업까지 맡는다는건 몹시 드문일이고 장덕만이 할수 있는 일이였다.
김완선-리듬 속에 그 춤을.
그는 무대에 올라 홀라 '춤' 하나로 승부하여 무대와 객석을 압도할 수 있는 최초의 댄스 뮤지션이었다. 본능적인 몸짓과 수없이 반복연습해서 얻어낸 솜씨였다. 그 모든것이 혹독한 연습의 댓가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김완선의 이모이자 음반기획자였던 한백희가 있었다.
인순이는 백댄서로 데뷔한 김완선은 역시 한백희의 계획에 따라 1986년 솔로 가수로서 독립을 시작했다. 그가 여는 댄스가수와 달랐던건 이모의 노력으로 당대에 유명인인 산울림의 둘째이자 베이스 가타 연주자인 김창훈의 참여가 파격적이었다. 그건 분명 기획의 승리였다. 산울림하면 보통 사이키데릭 록 음악을 많이 떠올리지만 1980년대의 산울림은 록과 뉴웨이브의 접목을 자주 시도하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두 번째 앨범은 김창훈에 이어 한국 록으 대부 신중현이 참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록의 대부와 한국의 마돈나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마돈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 까지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길어진다.
신중현이 만든 록-댄스곡 <리듬 속에 그 춤을>. 이 맞춰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신들린듯 보였다.
Appendix
몇몇 대형 기획사 의 특징.
SM - 이수만은 초기에 포크송을 위주한 한동준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힙합이라는 새로운 음악을 보고 현진영을 영입했다. 포크 김광진의 음악은 실패하고 현진형은 대마초 사건으로 모두 허물어진다. 그는 제2의 도약을 위해 R&B음악의 선구인 유영진을 영입하고 이때부터 유영진 (1집-그대의 향기 가 유명) 이 작사작곡한 노래가 히트를 하고 그 뒤에서 백댄스 역활을 했던 문희준과 강타가 결국 HOT 를 시작하고 SES 보아 드의 앨범을 제작한다. 그가 결국 체계적인 훈련과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이수만과 종신계약을 했다. 그는 군대에서 처음 작곡을 배웠고 당시 미국에서 활동중인 보이즈 투 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YG 는 힙합을 비롯해 흑인음악에 기반을 둔 음악 스타일을 고수 했다. 지누션이 양현석에게 처음으로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어준 이례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YG의 음악적 색깔이다. 페리 라는 탁월한 프로듀스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미,원타임,지뉴션,빅뱅, 2NE1, 엄정화의 앨범을 여러번 기획했다. 빅뱅과 2NE1은 힙합을 기본으로 깔고 최신 트랜드의 일레트릭 비트를 얻으며 점점 더 나아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자제하는 것이 YG 의 전략이다. 그리고 YG 는 실력파 그리고 지누션을 원로로서 조언을 많이 해주고 많은 이들이 조언을 준다. 그래서 이렇게 YG와 한번 맺은 인연은 패밀리 라는 연대의식을 갖게 해준다.
상대적으로 JYP 는 이런 끈끈함이 없다. 그리고 박진영이 모든 것을 관여하고 주도하는 편이다. 시중에 떠도는 돈이최고 SM, 우리 애들이 최고(YG), 내가최고(JYP) 라는 말이 이러한 특징을 잘 말해준다. 그러다 보니 JYP의 2PM 2AM 원더걸스 등은 박진영의 색깔이 그대로 반영될 수 밖에 없다.
참고자료.
- K-POP 세계를 홀리다 - 김학선
- 가수를 말하다.- 임진모
- 작업인문학 - 김갑수